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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잔인한 묘사가 쓰여져 있으니 심신이 미약하신 분은 가급적 읽지 않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 글은 사실을 기반으로 쓰여졌으나 워낙 옛날이야기라 현실과는 다른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은 방금전에 뚝딱 써낸 글로 저작권은 저에게 있습니다.


당시 사건 기사


1933년 5월 16일 경성부 죽첨정 3가(현재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에서 잘려진 아동의 머리가 발견되게 된다


후두부가 절개되어 뇌수를 긁어낸 흔적이 있는 이 유아의 머리의 발견으로 조선총독부는 발칵뒤집히게 되었다.


한국인들을 미혹하기 위해 경성부의 치안이 완벽하다고 선전하고 있던 와중에 이러한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발하게되자 조선총독부는 모든 인력을 투입하여 이 일의 진상을 밝히고자 한다.


수사 초기에는 아이의 머리를 감싼 종이가 '최춘홍 쌀집'에서 쓰인 봉투인 걸 파악해내고 쌀집 고객들을 탐문해가며 실마리를 잡아가는 가 했지만 결국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보호자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봉투에 묻은 흙과 버려진 곳의 흙이 다르다는 것으로 아이의 머리가 유기된 것을 알게 된 경찰은 보호자와 범죄자의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추측을 하게 되었고 친부모인 이상 이런 일은 할 수가 없다며 아이를 팔아먹을 목적으로 기르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어설픈 추리를 하게 되어 애꿎게도 고아들을 받아 키우는 하층민들이 수사의 표적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도 답이 나오지 않자 수사의 표적은 하층민 전반으로 넓혀졌다.


사건 이후 서대문경찰서에 잡혔다가 풀려난 하층민만 100명이 넘는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하층민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였다.


이렇게 약간의 의심이라도 가는 사람들은 모두 잡아조사하게 되자 결국은 실마리가 조금씩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6월 1일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를 검거하게 된다.


무당 이씨를 주요 용의자로 지목한 경찰은 무당의 집을 수색하게 되는데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어린아이의 옷이 나오는 등 여러가지 물적 증거가 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무당 이씨가 아이의 몸을 암매장 한 곳을 자백하면서 이 엽기적인 사건은 종말을 맞이하는가 했다.


하지만 경찰은 무당 이씨의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지 못 하였다.


소문난 주당이었던 이씨는 술로 가산을 탕진하여 땅바닥에 나앉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먹고 살고자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며 노숙을 하던 와중에 정신에 이상이 생기고 만 것 이다.


무당 이씨의 자백에 따라 며칠 밤낮을 샅샅이 뒤진 후에야 이씨의 정신에 이상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렇게 장대한 삽질을 하게 된 후 경찰은 근본부터 다시 점검하여 산 아이의 머리를 밴 것이 아니라 죽은 아이의 머리를 밴 것이 아닌가라고 조사방향을 틀게 되었다.


그리고 사건 전후로 묻힌 아이의 무덤을 모조리 파보기 시작했고 이네 한창우의 딸의 무덤을 파보게 되었다.


그리고 시체의 머리가 없음을 확인하게 된 경찰들은 그 즉시 한창수와 그의 아내와 동거인, 그리고 매장에 참여한 한창수의 형을 즉시 체포하게 되었다.


그들을 체포 한 뒤 경찰은 머리와 시체를 대조해 보기 시작했고 본래 피해자가 살아있는 남자 유아라고 오진을 내렸었던 부검의들은 보다 신중해져 통상의 시간보다 3배 가량 시간을 사용하여 검토한 뒤에 한창수의 딸이 피해자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결과를 발표하기전 이미 약간의 의심이라도 가는 용의자들은 모두 체포해놨던 경찰들은 이제 범인이 아닌 자들만 솎아내면 되었으며 결국 범인 배구석과 공범자 윤명석을 체포하게 되었다.


배구석과 윤명석 이 둘은 모두 성실하게 살며 주위 사람에게도 평판이 좋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아이의 뇌수가 간질에 특효약이라는 미신을 주워듣게 된 윤명석은 간질병이 있던 셋째 아들에 대한 애정으로 이러한 일을 벌이게 된 것 이다.


하지만 윤명구의 아들은 간질이 나아지기는 커녕 더욱 악화되었고 거기에다 범행이 들통난 이들은 배구석은 징역 4년 윤명구는 징역 3년을 받게 되었다.


잘못된 판단으로 아들의 병을 도리어 악화시키고 아들을 곁에서 돌봐줄 수도 없게된 것 이다.


소개해드린 이 두 사건은 구한 말까지도 잘못된 민간요법으로 흉흉한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경성 죽첨정 유아 단두 사건 역시 조선총독부가 체제선전을 목적으로 모든 인원을 총동원해가면서 수사하지 않았다면 미제사건으로 갔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로 주목받지 못하고 스러져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엇을 것 이다.



==참고 자료==


https://namu.wiki/w/%EA%B2%BD%EC%84%B1%20%EC%A3%BD%EC%B2%A8%EC%A0

%95%20%EB%8B%A8%EB%91%90%20%EC%9C%A0%EC%95%84%20%EC%82%AC%EA%B1%B4


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2/13/1049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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